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8월 28일

일에서 다소 혼선 있었다. 멘토링도 받고, 주위 도움도 받고 하면서 마음 잡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한 듯 하다. 간단히 말하라면, 큰 원칙 하나를 또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데,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다.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고, 그걸 하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또 들었다. 

공부 측면에선,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이야기다. 하고 싶은 것들 공부를 많이 했는데, 해야 하는 일과 간극이 있다 보니 그냥 공부만 좀 하고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긴 기간 동안에 걸쳐 스스로를 돌아보면, 공부의 깊이에 네 단계가 있었다. 대충 아이디어가 정리되는 단계, 이 단계에선 사람들이랑 이야기는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결과물에 대해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그 다음으론 내가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무언가 계산하고 결과를 만들어 보는 단계. 이 단계에선 그러니까 이용할 수 있고, 결과를 나름대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여전히 이 단계에서는 그 공부에 대해 블랙 박스같은 상태에 머물고, 그렇다 보니 항상 불안하다. 내가 제대로 알고 이용하고 있는지, 깊은 질문을 받으면 과연 내가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 지. 그래서 그 다음 단계에선 그 아이디어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한다. 이미 정리는 대충 해 봤고, 실제 데이터를 이용해서 결과도 여러가지로 뽑아 봤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단계는 저널 논문을 쓰지 않으면 사실 잘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다르게 얘기하면, 그 전 단계까지만 해서 저널 논문 말고는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다소 고통스러우나 그래도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누구랑 이 공부에 대해 얘기를 해도 편안하고, 이 방법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두고 평가할 수도 있고, 그리고 어디가 문제고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 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니까, 블랙 박스를 열어 그 안의 구조를 파악하고, 편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상태다. 이 단계에선 논문 쓰는 것도 그렇고, 실용적인 이용에 있어서도 수월해 진다. 이 다음 단계는 그 블랙 박스 설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박스를 제안하는 단계다. 나는 이 단계에 아직 이르렀던 적이 없다. 아주 사소한 튜닝을 하거나 대략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여전히 그 공부를 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이런 일을 하면 이제 좋은 이론 논문을 쓸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상당히 많이 그 논문이 다른 사람에게 읽히게 된다. 나는 아직 여기에 도달한 적이 없다. 

이게 지금은 무언가, 나의 곤혹스러움이다. 아직 다다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 그리고 또 내게는 자원이기도 하다. 지금 정도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무척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 적당히 어딜 가면 통한다. 뭐 대충 얘기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뭔가 직관이 빛나는 코멘트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삶을 오래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제도. 

 

8년 전 도우너 선생님 앞에서 발표했던 베이지안 통계학 슬라이드를 어제 꺼내서 보았다. 그 때 생각을 많이 했다. 얼마나 나는 따라왔는가 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