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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차에서 옆에 탄 학생은 90년대 학교에서 뛰어나온 것 같았다. 짧은 커트에 염색을 밝게 하고 운동화에, 오래된 캐논 카메라 가방, 피켓 까지.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 대화가 들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병우, 최순실, 박근혜를 얘기했다. 또 일 때문에 들른 이태원이나 신촌은 예스러웠다. 뭔가 꿈틀꿈틀 거리는 것도 같고, 한 번 축제 처럼 하고 일상으로 빨리 돌아갈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월드컵 거리응원 처럼. 마음 한 켠에선 예전에 읽었던 김지하의 수필 속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지하가 수배 중이었나 그런 중, 시내 외곽에서 거대한 군중의 무리를 발견하고 - 다소 자연 발생적인 가두 시위 였던 걸로 기억한다 - 발걸음을 돌리며 계속 되뇌인 얘기였다. 저렇게 지도부도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즉자적으로 해선 안돼, 그러면 안돼. 깊게 대중운동에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가지는 예지가 있었다,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이 날 지 눈에 선히 보인다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수필은 그러니까 그 예지가 꼭 맞지는 않았다는 뉘앙스로 마쳤다. 내 기억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출처가 기억 나지 않아서 아쉽다. 그러니까 나도 나름대로, 이게 어떻게 흘러가고 마무리 될 지, 그 귀결이 얼마나 좋을 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중간에 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헤아리지 않으면, 정말 이 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한 편으론 계속 1997년 봄, 그 생각이 난다. 그 때는 한보비리가 컸고, 김현철 국정 농단이 터지는 그런 때였다. 풍요 뒤에 외환 위기의 전조가 드리워져 있었고, 하지만 여전히 다소 낭만적이어도 괜찮았던 봄. 일본 영화를 못 보게 하는 등의 일에 쉽게 공분을 모을 수 있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 때 4월에는 우리 과 신입생 50명 중에 30명이 넘게 서초역 대검찰청 앞에서 야간 가두 시위애 참여하기도 했다. 학교 전체로 봐도 그 정도, 5000명이 넘게 가서 신문에 크게 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어지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큰 사건들 뒤에서 한총련 출범식 사태가 터지고, 사람이 몇 명 죽고, 엄청나게 찬 바람이 학교 밖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집에서도 불었던 기억이다. 난 그 때 이후 몇 년 더 무언가 참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 봄이 지난 이후엔 세상이 나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해야 해서 하는 거지, 하는 게 맞는 것 같으니까 하는 거지. 80년대 학생 세대가 직선제 헌법을 얻었고 90년대 초중반 세대가 UR과 518 특별법을 얻었다면. 나는 90년대 후반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얻지 못한게 특징인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언제나.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로만 제한을 두면, 엄청나게 외로웠던 세대, 어디에서도 내 편을 찾을 수 없었던 세대. 나중에 대부분 이 사람들은 자기가 세웠던 단체-조직을 무너뜨리고 다른 삶으로 향했다. 그럴듯한 해산 선언문을 쓸 것도 아니었고, 예전 사람들 처럼 무협지 같은 후일담 소설을 쏟아낼 계재도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에, 다들 늦게나마 잘 사는 사람이 많다. 15년 쯤 지나고 나니 다들 한 자리씩 하고 있고, 만나면 여전히 반갑지만, 무언가 나는 내 마음속엔 여전히, 손을 대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던 그 시절이 아프면서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도 이 무언가 현상적으로 보이는 에너지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그게 퍽이나 두렵다,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틀릴 수 있지만.